장편과 단편 · 단편소설
지옥의 온도
지옥의 온도
The Temperature of Hell
강남의 일타 강사가 죽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들이 기다리는 곳에 간다. 경쟁이 아무 의미 없는 사후 세계다.
줄거리
남자는 눈부신 터널을 지나 안개 속에서 아들 민준을 만난다. 명품 아파트 25층에서 떨어진 아이다. 아버지는 서울대 출신 대치동 일타 강사이자 강남에서 가장 잘나가는 학원 원장이고, 아이는 학원 다섯 곳을 다니며 만화만 그리고 싶어 했다.
끊기지 않는 대화 속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직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준다. 누구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예술가가 가장 행복하며, 약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 인정받는 곳. 아버지가 무시하던 시인인 엄마도 이곳에 있고,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희미해지기 전, 아이는 한 번에 한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좁은 다리를 가리킨다. 오르려는 사람은 모두 다른 이들에게 끌려 내려온다. 홀로 남은 아버지는 누구도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하며 성큼성큼 다리로 향한다.
영상화 포인트
- 사후 세계에서 바라본 한국의 사교육 경쟁을 2인극 한 장면으로.
- 경쟁 교육에 관한 신문 연재를 위해 쓴 작품, 조용하고 서늘한 결말.
도입부
빛이 있으나 밝지 않았다. 지독한 안개에 싸여 있는 느낌이었다. 눈부신 터널을 통과한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남자는 어떤 존재와 마주하고 있음을 희미하게 알 수 있었다. 아! 그가 짧게 탄식했다. 내 아들 민준이구나. 맞지? 세상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아이를 안으려 뻗은 손이 허공을 갈랐다. 적응이 필요해요. 여기서는 아빠가 배워야 할 게 많아요. 당황하는 남자를 향해 아이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는 것 같았다. 여전히 시각으로는 눈코입조차 구분할 수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아이의 모습은 선명하다. 25층에서 추락한 끔찍한 시신은 얼마 뒤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천국이 있었어. 역시. 그런데 민준아. 왜 텅 비어있는 거니? 지금은 안 보일 거예요. 제 뒤에 있는 자작나무 숲도, 회화나무 위에 있는 동박새도. 첨벙 소리 못 들으셨죠? 물오리 한 쌍이 방금 시냇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빠 표정은 별로 좋지 않네요.